걸어온길

1964 _  칠삭동이 막내아들

아버지 김주완과 어머니 김춘옥 사이의 아들 셋 중 막내로 태어났다. 칠삭동이로 태어나 세상에 나면서부터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70~1984  명랑한 학창시절

서울 전역 안살아본 동네 없이 다 살아봤다. 여러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버스차장 누나들, 구두닦이 형들, 귤장수 아줌마들의 사랑을 받은 서울역 앞 소공자, 신광초, 오산중, 서대문중, 숭실고, 서울대를 졸업했다.

1985 _  광주진상규명을 외친 총학생회장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되어 민주화운동으로 법정에 섰을 때, 재판장과의 문답이 화제가 되어 많은 격려를 받았다.
"광주사태 현장에 없었으면서 어떻게 진상을 아는가?"
"3.1 운동은 꼭 참가한 사람만이 이야기 할수 있느냐!

1992 _  첫 도전에서 맛본 실패의 쓰라림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위해 현실정치에 입문, 여당 민자당의 부총리 출신 나웅배 후보와 맞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1달만에 치른 선거, 다윗의 선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259표차의 석패. 이 실패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이켜 보게 한 소중한 기회였다.

1994 _  자신을 새롭게 세우며 현대행정을 공부한 미국 유학

젊을 때 좀더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전세금을 빼서 떠난 미국 유학, 우리 사회와 정치, 자신과 미래에 대해 깊숙이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 었다. 하버드대학 케네디 스쿨(행정학 석사)에서 시대의 흐름과 창조적 리더십을 탐구한다.

1996 _  첫 직장이 된 영등포, 여의도

15, 16대 총선에서 서울지역 최다득표율(60%)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의 감격을 맛보았다. 밤을 새우며 함께 거리를 누빈 당원과 자원봉사자들, 미래를 기대하던 주민들의 따뜻한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96 ~2002  1등 국회의원의 약속을 지키다

1등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시민과의 약속, 이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쉼없이 공부하고 일했다. 동료의원이 뽑은 1등 국회의원, 한보 청문회와 경제 청문회 1등 국회의원, 시민운동가 공무원이 뽑은 1등 국회의원 등에 한해도 빠짐없이 선정되었다.

한발 앞선 의정 활동, 끊임없는 정책개발

국회가 열리지 않았을때에도 정책자료집과 리포트를 한달에 1-2회씩 냈다. 국정감사 때 4-5개씩 자료집을 제출한 최초의 국회의원이었다. 공부하지 않는 정치인만큼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1999 _  신사복 모델로 영등포에 2억 장학금

신사복 모델로 출연했을 때, "국회의원이 모델을 하면 되나, 권위가 떨여져!" 라고들 걱정 했다. 하지만 IMF로 늘어난 결식아동 등을 돕고 싶었고, 북한의 결핵퇴치사업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모델료 2억원을 전액 기부했다.

2000 _ 국제 감각을 지닌 뉴리더를 꿈꾸며

정치인에게도 국제 감각은 최고의 경쟁력이다. 일본의 젊은 의원들과 새로운 외교통로를 개설했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햇볕정책에 대해 연설하는 등 다양한 외교활동으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지도자 100인에 선정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총재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창당, 영입, 공천작업의 실무책임자, 새천년민주당의 첫 총재비서실장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보좌했다.

2001 _  학부모들과 함께 한 청소년 보호활동

인터넷 음란물 등 청소년 유해환경 정화를 위한 전국 학부모 대상 강연회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며 아름답게 커나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이상과 현실을 결합시키는 정책 디자이너의 경험

시대의 전환기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민주당의 특대위 간사로 국민적 히트상품인 국민 경선제를 디자인 했다.

2002 _  집권 민주당 서울시장후보, 석패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와 접전, 여권핵심부 비리 논란으로 수도권 민주당 후보들이 대패(20% 차이)하는 가운데, 9% 차이로 석패.

대선후보단일화-정권재창출을 향한 헌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세론을 뒤집기 위한 후보 단일화, 그 해결사의 임무를 맡았다. "단일화를 이루고 돌아오겠다" 는 성명과 함께 탈당. 천신만고 끝에 단일화가 성사되는 날 정몽준 지지철회 파동으로, 엄청난 비난의 십자포화 속에 정치적 격하의 긴 동면에 빠져들었다.

2003 ~ 2007  미국, 중국 유학. 미국변호사까지.

상해교통대, 상해 정법대 수학, 뉴저지주립대 로스쿨(박사. 2010년말 졸업), 중국 청화대법대(석사:2010년 6월 졸업)유학. 자신의 홈페이지에 퇴수일기 (퇴수: 조용히 물러나 내공을 쌓는다는 뚯)를 쓰면서 한국의 나아갈 길에 대한 공부에 전념하였다. 퇴수는 "정치를 오래 할 사람이니 지금 퇴수하기를 참 잘했다"는 DJ의 격려에서 따온말. 로스쿨 공부는 국제정치 학습의 연장인 국제법 공부를 통해 미국변호사가 되는데까지 이어졌다.

2007 _  다시 정치현장으로

(구)민주당 대통령후보경선에 참여하면서 정치복귀, 안희정, 박지원 등과 함께 2008년 총선 공천탈락, "정말 정치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비우고 난천자들로 이루어진 " 화려한 부활" 유세단 단장으로 총선 지원 2008년, 오랜 공백을 딛고 판메이커를 자임하며 민주당 최고위원에 2등으로 선출됨. 정치인의 생사는 정말 알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다.

2009 _  정치자금법의 멍에

2002년 서울시장선거 당시 중앙당의 과실로 정치자금법의 멍에. 2009년 원외시절의 친구와 후원자들의 도움을 문제삼아 다시구속. 100일만에 자유. 김민석에게 들이댄 잣대와 똑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

2009 ~   프로보노 운동

재능 나눔 프로보노코리아 창립 및 상임이사.
미국에서 로스쿨에 다닐 때부터 꿈꾸었던 프로보노(각계각층 전문가들의 재능나눔)운동. 해외 각국의 한인 변호사들을 엮어 국제적인 인권문제와 국익수호에 앞장서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다. 정치와는 별도로 평생해보고 싶은 일이다.

2016 _  원외 민주당 대표로 정치활동 재개

사라질 뻔한 당명을 지키기 위해 민주당 대표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민주당 · 더불어민주당 합당

민주세력의 통합과, 정권교체를 위해,
민주당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 뛰었다.

2017 _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종합상황 본부장으로 활동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민석 특보단장은 종합상황 본부장을 맞아 대선승리를 위해 헌신하였다.

민주연구원장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의 정책과 전략 수립을 지원하는 민주연구원장으로 활동하며 정당정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맡았다.

2019 _ 포용국가비전위원회 위원장으로...

문재인 정부의 비전인 '혁신적 포용국가 실현을 위해 당차원의 정책수단 고민을 이어 가겠다는 취지로 포용국가비전위원회는 효과적인 '포용 국가 ' 설계를 위해 조세 복지제도 등에서 정책수단을 찾아가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일본의 경제침략이 맞서는 일본경제침략대책위 부위원장으로도 뛰고 있다.

2020 _ 제21대 영등포구(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제21대 국회의원 당선 '영등포를 일등포로'

이제 함께하는 정치.

크게보고 천천히 가는 정치, 남을 돕는 정치를 하고 싶다.